전라북도 익산 쌍릉 무덤의 주인.jpg

전라북도 익산 쌍릉 무덤의 주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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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금마저에 해당되는 현 전라북도 익산에는 오래 전 부터
민간에서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부르는 두 개의 큰 무덤이 있었다.

흔히 쌍릉이라고 하는, 이 무덤들은 이미 고려시대 부터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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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쌍릉은 1917년 일본인들이 연구라는 미영하에 마구잡이로 파헤친다.
어차피 그들로써는 지들 왕의 무덤도 아니고 식민지 왕의 무덤이었으니...

이 당시 사람 어금니 몇개와 목관의 잔편, 그리고 목관 장신구 몇점이 수습되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이것들은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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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은 쌍릉에서 출토된 사람 어금니를 조사해 여성의 것이니
쌍릉의 주인은 백제 왕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게다가 신라 양식의 토기가 발견되자,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가 무덤의 주인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제시 했었다.



쌍릉의 주인은 백제 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하는 논란이 다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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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2009년 미륵사지석탑 보수 공사 당시로 되돌아가야 한다.

보수 공사를 진행중에 탑 안에서 금제 사리함과 사리봉영기 두 장이 발견된것이다.

특히 사리봉영기 두 장의 내용은 당시 학계를 뒤집어 엎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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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봉영기의 내용은 이렇다.

"백제의 왕후 (王后)는 좌평 사택적덕 (沙宅績德)의 딸이며, 639년 사택적덕의 딸이 대왕의 건강회복을 위해 사리를 봉안했다"

이는 그동안 정설로 믿어왔던,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이고, 무왕 부부의 발원에 의해 미륵사가 조성되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붕괴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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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역사서 중 고구려의 역사서 유기 100권을 비롯한 신집 5권과

백제의 역사서 서기 등은 당나라 군에 의해 불살라 버렸고,

신라의 역사서 국사는 실종 상태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삼국시대 종말 이후 300~400년 후에 쓰여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정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삼국시대 당시의 문서가 발견되었으니, 이것이 삼국유사 보다 실제 역사에 가깝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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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에 미륵사지석탑 안에서 발견된 사리봉영기 문서들로 인해

무왕의 왕비는 사실은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의 딸이고,

무왕의 왕비인 사택왕후에 의해 639년 미륵사지석탑에 사리가 봉안 되었다는게 밝혀진것이다.


2016년 전주박물관의 발표는, 사리봉영기의 내용을 다시 뒤집고 선화공주가 무덤의 주인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무왕과 선화공주 (서동요의 서동과 선화공주 설화)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반색할만한 결과였다.

이렇게 되자, 쌍릉의 주인이 선화공주인지 사택왕후인지가 다시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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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륵사 창건과 쌍릉의 주인을 둘러싼 대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합동으로

쌍릉의 재발굴조사에 들어갔다.

2018년 3월 다시 무덤의 문을 열고 발굴을 시작했는데

이 때 논란의 해답을 가진 목재 인골함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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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7일 합동 발굴단과 학자들이 모여서 조사한 최종 결과를 발표하였다.

당시 목재 인골함에서 나온 유골들을 공동 연구한 팀의 구성원은

고고학, 역사학, 법의학, 유전학, 생화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등의 전문가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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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결과는 아래와 같다.

이 유골 조각들은 여러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것이다.

유골 조각의 주인은 키가 161~170 센티미터 정도로 당시로써는 상당히 큰 키의 60대 남성이다.

이 남자는 생전에 낙상한 결과 골반뼈에 골절이 생겨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늙어서는 '광범위 특발성 뼈과다증 (DISH: Diffuse Idiopathic Skeletal Hyperostosis)'에 걸려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참고로, 위의 사진이 발굴된 유골 중 등뼈에 해당하는 사진이다)
이 병은 인대가 골화 (뼈 처럼 굳어버리는 현상) 되는 희귀질병으로 50세 이상의 남성에게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
발병 원인은 분명치 않지만, 어패류를 장기간 다량 섭취한 결과로 생길 수 있다.

아울러, 연구에 참가한 법의학자들은 종전 박물관의 어금니 연구 결과가 여성의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며, 출토된 어금니만으로는 연령이 많은 것은 확인할 수 있으나, 성별은 알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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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쌍릉 중 대왕릉의 규모는 왕릉급이 분명하고,
그 연대는 7세기 전반 무렵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이들 연구 결과들을 모아서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다.

1. 7세기 전반에 60대의 나이로 사망한 평균 신장 보다 큰 키의 남성

2. 당시로는 귀한 어폐류 같은 고급 음식들을 장기간 섭취해서 발병한 질병을 앓았으며.
극삼한 통증으로 장기간 투병생활을 한 병력

3. 당시 신도시 였던 익산과 인연이 있어, 익산에 묻힌 남자


여기에 부합하는 백제 인물은 역사상 단 한명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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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쌍릉의 진짜 주인은 선화공주도 아니고, 사택왕후도 아닌...

바로 백제 무왕이었던것이다.

연구에 참가했던 전문가들은 뼛조각으로 부터 찾은 단서들로
1,500년의 시간을 넘어 후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무왕 앞에서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다음날 오전 모든 언론에서 '백제 무왕의 무덤 확인' 이라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일제히 보도 되었다.


이 연구결과는 2018년도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의 최대 성과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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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백제왕의 무덤으로 거의 확실시 추정되는 무덤이 하나 더 있긴 하다.

바로 서울시 석촌동의 고분군 3호다.

이 무덤은 고구려와 똑같은 돌무지 양식의 무덤이고,
무덤의 주인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하면 무덤의 주인이 가려질 수도 있지만, 현재까지 그런 움직임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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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골 연구를 통해, 특정 인물의 신원 까지 정확히 밝힌 무왕의 경우는 매우 기적같은 경우이다.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

그 예로 무령왕릉만 하더라도, 발견 당시 사진 속 상자의 유골은 이미 썩어 없어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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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박물관의 주장이 화근이 되어 다시 시작된 무덤 주인 논쟁은,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한 무덤 재발굴로 이어졌고,

재발굴 중 발견한 유골함에서 기적 같이 유골들이 남아 있었다.

이 유골들을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역사서의 사실들과 대조 확인한 결과,

쌍릉의 주인이 백제 무왕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쌍릉은, 무령왕릉에 이어 두번째로 무덤 주인의 신원이 확인된 백제왕의 왕릉이다.

바로 백제 무왕의 왕릉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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